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다윈 (문단 편집) ==== [[에든버러 대학교]] 의학과 ==== 1825년, 찰스 다윈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에든버러 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에든버러 대학교]]는 해부학계에서는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으며 찰스 다윈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으므로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윈은 여기서 1827년까지만 공부하다가 자퇴하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당시의 대학교는 지금의 인강 사이트와 비슷하게 운영되었는데, 학생들은 강의를 듣기 위해 대학에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강사에게 직접 지불했고, 강사는 그 돈으로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 소위 '돈이 되는 강의'를 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쟁에서 자유로운 강사들이 있었는데 그 강사의 과목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된 경우였다. 이럴 경우 기본적인 학생수가 보장되므로 어떤 강의를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고, 대충대충 강의하는 교수들이 나타났다. 이런 대충대충 강의하는 교수들 중에는,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강의하던 강의록을 그대로 읽는 교수도 있었다. 그래도 수업이기 때문에 따라가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다윈은 이내 지쳐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들었던 해부학 수업이었다. 해부학으로 유명한 [[에든버러 대학교]] 답게 해부학 수업은 강사가 실제 사람의 시체를 가지고 해부를 하면서 진행되었는데, 다윈의 강의를 담당하던 교수[* 알렉산더 먼로라는 해부학자였다.]가 능력이 부족하여 좋은 시체를 구해오지 못했다. 이는 당시 스코틀랜드 법률이 바뀌면서 해부용 시신을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컸다. 당시 해부학자들은 남몰래 묘지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을 파오는 도굴꾼들과 거래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는데, 망자에 대한 존중의식이 점점 신장하면서 도굴꾼들이 활동하기 어려워진 것이 큰 요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다윈이 수강하던 시기, 해부학 수업에 사용된 시체는 온전한 시체라기보단 방부제에 절여진 덩어리에 불과했고, 공부할 만한 부분들이 이미 상당히 훼손되어 제대로 된 강의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학생들이 직접 실습할 시신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잘 보이지도 않는 시신을 멀찍이서 바라봐야만 했다. 그 시체를 보면서 다윈은 수술을 하는 것에 혐오감을 가졌다. 설상가상으로 교수의 강의력까지 좋지 않아 찰스 다윈은 이 수업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에는 마취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 수술을 하며 엄청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어서 저런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에 큰 회의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공부하는 환경에도 적응하기 힘들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의사가 되어 해부나 수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윈은 정말로 의사가 되기 싫어했다. 다윈은 점차 자신이 굳이 의사가 되어 생계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의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1827년 [[에든버러 대학교]]를 자퇴하게 된다. 그는 의사가 되는 길보다는 성공회 신부가 되는 길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러한 아들의 생각을 받아들여 찰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크라이스트|크라이스트 컬리지]] [[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를 자퇴하기 전, 찰스 다윈은 로버트 그랜트와 함께 플리니안 학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학회는 에든버러에 다니는 학생들이 모여서 서로 연구한 것을 발표하고 함께하는 모임이었다. 로버트 그랜트는 찰스 다윈의 동료와 같은 존재였는데, 찰스에 비해 아는 것이 많고 연구 방법 등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젊은 과학자로 명성을 쌓고 있어 이내 찰스는 로버트 그랜트의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둘은 함께 해양의 무척추동물을 연구하였는데 찰스는 이때 현미경을 다루는 법 등의 기본적인 생물학 연구 방법을 익히게 된다. 연구를 통해 아는 지식이 크게 늘어났음은 당연한 이야기다. 또한, 이때 이미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도서 대출 목록이나,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진화론적인 사상을 가졌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나 라마르크의 저서들을 읽어보았음은 명확하다. 이들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많았기에[* 라마르크는 [[용불용설]]을 주장했던 그 라마르크 맞다. 그는 당대의 저명한 진보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다윈의 진화론이랑 맨날 비교당하는 신세지만.] 다윈이 그 영향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그와 자주 붙어다녔던 로버트 그랜트 역시 라마르크주의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즉 다윈이 대학생인 시절에도 '진화'라는 개념은 낯선 개념이 아닌 학계 최신의 떠오르는 연구분야였으며 많은 '가설'들이 나오던 시점이었다. 사소한 이야기지만 의대 재학 시절 유명한 [[연쇄살인마]]와 엮인 적이 있다. 이 당시 연고 없는 노숙자나 극빈층을 골라 살해한 뒤 자연사로 위장해 에든버러 의대에 해부용 시체로 팔던 윌리엄 버크(William Burke)와 윌리엄 헤어(William Hare)[* 이들에게 살해되어 팔린 희생자만 16명. 참고로 이들의 주 거래 대상은 로버트 녹스라는 또다른 해부학자였다. 버크는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하여 해부당하는 신세가 되지만 헤어는 사법거래로 추정되는 석연치 않은 명목으로 석방되어 1862년에 암으로 사망한다. 석방되기는 했지만 세간의 이목은 여전히 살인마 취급이라서 평생 숨어 살았다.]를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교수를 대동하거나 혹은 혼자 만나서 시체상태를 살핀 뒤 시체값을 두고 흥정을 벌였는데 나중에 사건이 발각되자 이 때문에 다윈은 경찰 조사도 받고 법정에 나가 증언을 하기도 했다.[* 출처 : R. Michael Gordon의 The Infamous Burke and Hare: Serial Killers and Resurrectionists of Nineteenth Century Edinburgh.] 그래서 후일 다윈이 진화론을 두고 공방을 벌일 때 공격 측에서 이 일을 거론하며 [[인신공격]]에 쓰기도 했다. 공격의 요지는 "'''당신 진짜로 그 시체들이 살해 당한 시체라는 걸 몰랐나?'''"는 것. 이 부분은 [[사이먼 페그]] 주연의 영국 영화 '버크와 헤어(Burke and Hare)'에도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예 다윈이 살해 당한 시체인 걸 눈치 채고도 사는 것처럼 묘사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